‘상수도 수질개선 종합 대책’수립
지금은 생수사용이 일반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마시지만 필자가 건설부 상수도과장으로 재직(1986~1989)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수돗물을 음용함에 따라 상수도 수질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국민들의 관심사였다. 당시 상수도 수질 불량의 주요 원인은 원수의 수질 악화, 정수처리의 고도화 불충분, 노후 관 등으로 인한 2차 오염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로 인한 것이었다.
필자는 상수도 수질을 대폭 개선시켜야 하겠다는 의지로 ‘상수도 수질개선 종합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여기에서 상수도 수질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서는 상수도 수질상의 문제점을 맨 앞에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련된 ‘상수도 수질개선 종합 대책’을 관계 전문가들의 합동 검토를 거친 후 관계부처와 협의를 하고 있는 과정 중 어느 날 ‘상수도 수질개선 종합 대책’ 상에 기술된 상수도 수질 상의 문제점이 그대로 경향신문 1면 Top 기사로 보도되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노태우 대통령 주재 하에 관계 장관 회의를 청와대에서 다음날 9시 30분에 개최한다는 통보를 오후 7시경에 받았다. 보고는 건설부 장관이 해야 했기 때문에 회의자료 초안을 밤 10시경에 작성 후 장·차관, 기술관리실장, 하수도과장(곽결호)과 함께 밤을 새워 3~4차례의 검토와 수정을 거쳐 새벽 5시 경에 최종 보고내용을 확정하였다.
박승용 국장과 함께 장관댁(잠실)에 가서 최종 정리된 자료를 전해드렸고, 장관댁에서 나와 8시 조금전에 과천 사무실에 연락해 본 바 청와대에 보낼 회의 자료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침 출근 시간대에 과천에서 8시가 지나서 출발하여 청와대에 9시까지 도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해 보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청와대에 9시까지 도착토록 하라고 과(課)에 지시한 후 급히 청와대로 갔다.
청와대 동쪽 주차장에 청와대 파견 비서관 등과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9시 5분전에 신현만 사무관이 고급 승용차에서 뛰어 내려와서 자료를 전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나중에 신현만 사무관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택시를 타고서 택시기사에게 대통령께 보고해야 할 서류이니 청와대에 9시전까지 도착해 달라. 돈은 얼마든지 줄 것이고 교통법규 위반으로 문제가 되면 본인이 다 책임지겠다고 공무원증을 보여주고 약속하여, 비상라이트를 켠 채 사고가 나지 않을 정도면 교통신호도 무시하고 달렸다고 한다.
청와대 외곽 군 경비초소에서부터는 택시진입이 안되는데 마침 고급 승용차가 오기에 무조건 가로막고 태워 달라고 하였더니 뒷좌석에 앉은 높아 보이는 분이 기사에게 태워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현만씨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권영각 장관은 청와대 회의에서 보고가 원만히 끝나서 만족하신 것 같았다. 타이피스트 여직원까지 포함하여 전날 밤에 밤을 샌 전 직원들을 모두 장관실로 불러 차를 대접하면서 수고하였다고 노고를 치하하여 주셨다.
상수도 수질에 관한 문제점이 언론에 누출된 사건은 결과론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에 따른 정부대책으로서 상수도 수질개선사업이 범국가적으로 적극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수 수질개선을 위한 하수처리시설의 대폭 확충, 노후된 급·배수관의 교체도 아울러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필자에게도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처음 경향신문에 보도된 후 혼자서 속으로 ‘이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른 처벌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자.’ 하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청와대 회의 전날 저녁, 한수은 차관보와 함께 장관실에서 자료 보고를 하고 나오는데 장관께서 “한 차관보, 자료유출 경위조사 하는 것 어떻게 되었소?”라고 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 막 문을 나오려는 참이었는데 되돌아가서 “장관님, 제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고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경위를 설명드렸다.
“전문가 회의 시에는 자료에 ‘대외비’ 표시를 하고 회의 후 전부 회수하였으며, 관계부처 협의 시에도 공문서에는 ‘대외비’ 표시를 하였으나 첨부 자료인 ‘상수도 수질개선 종합 대책’에는 ‘대외비’가 표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장인 저의 불찰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장관께서 잠시 후 “첨부 자료에도 대외비 표시를 했어야 하는데 그랬구먼!”하고 말씀하시는 그 순간, ‘아~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장관께서 혼자서 중얼거리시는 어감이 탓하는 어감이 아니고 아쉬워하는 어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권 장관께서는 취임 후 거의 모든 서류를 ‘비대면(非對面)’ 방식으로 문서만 보고 결재를 하셨다. 따라서 장관과 대면하는 기회가 매우 적었는데 청와대 보고 전날 밤을 같이 보냈으니 그것이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뒤 국장 승진 기회가 있을 때 필자는 기대를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국장으로 승진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좌천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승진하게 됐으니 이것이 전화위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직인사 뒷이야기
필자가 수자원국장으로 재직 시 수자원국의 주무과인 수자원정책과의 과장은 김창세 과장(나중에 건설부차관보 역임)이었다. 김창세 과장은 ADB 파견 근무 후 귀국하여 국립건설연구소에서 근무 중인 것을 필자가 추천하여 수자원정책과장으로 오게 된 것이기 때문에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당시 상하수도국 상수도과장이었던 곽결호 과장(나중에 환경부 장관 역임)이 국장급으로 승진하면서 상수도과장이 비게 되자 당시 상하수도국장이었던 박용승 선배께서 김창세 과장을 상수도과장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필자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박선배가 끈질기게 요구하기에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수자원정책과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6개월 전에 서기관으로 승진하여 부산지방국토관리청 하천국장으로 근무 중인 이문규(나중에 수자원공사 부사장 역임)씨를 수자원정책과장으로 보임시켜주면 동의하겠다고 하였다.
<대한건설진흥회 발간 ‘국토교통인의 향기’ 발췌>